흙수저 형님 동생 MB의 대통령 비밀 공개!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약력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포항 동지상고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61년 코오롱의 1기 신입 공채사원으로 입사한 후, 코오롱 및 코오롱상사의 대표이사직에 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정치인의 삶으로 전향하게 되며, 1988년에는 정계에 입문하였습니다. 그의 정치 경력은 13대 국회에서 시작하여 총 6선의 경과를 통해 18대 국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원내총무, 사무총장 등 여러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정치적 경력과 성과
이상득 전 부의장은 '미스터 위기관리'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1998년 IMF 위기 당시 야당 원내총무로서 금융개혁 13개 법안의 통과를 이끌면서 얻게 된 별명이기에 그가 위기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후, 그는 사무총장으로서 천막당사를 제안하여 보수 정당 재건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결단과 경륜은 동생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 도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이상득 전 부의장은 1988년 정계에 입문하였다.
- 그는 1998년 IMF 위기 시기에 법안 통과에 기여하였다.
- 또한 천막당사 제안으로 보수 정당 재건을 도왔다.
이명박과의 관계
이상득 전 부의장은 동생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그의 정치적 경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는 이명박의 대선 후보 지명 과정에서 후견 그룹 '6인회'를 조직하고 이끈 주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이명박 당선 이후 '상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고,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신뢰와 권역을 유지하면서 관계를 통해 서로 의지하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 후의 삶
이상득 전 부의장은 2009년 정치 2선 후퇴를 선언하며, 국회의장이라는 꿈을 접었습니다. 이후 그는 남미 및 아프리카에서 자원 외교에 주력하며 리튬 개발 협의 등 여러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볼리비아를 다섯 차례 방문하며 자원 외교의 핵심 성과로 여겨지는 일들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19대 총선 전 불출마 선언 이후 저축은행 관련 혐의로 구속된 사건은 그의 정치적 커리어에 큰 타격을 남겼습니다.
법적 문제와 구속
구속된 사건 | 기간 | 처벌 내용 |
저축은행 금품 수수 | 1년 2개월 | 구속 기소 |
포스코그룹 뇌물 수수 | 1년 3개월 | 실형 선고 |
이상득 전 부의장은 이전의 정치적 입지에도 불구하고 법적 문제에 시달리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친형으로서 구속된 첫 사례로 남았으며, 이후 여러 차례 비판과 의혹 속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인으로서 인생 후반의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던 그는 여전히 국가에 대한 걱정을 잊지 않았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장례 및 사회적 반향
이상득 전 부의장은 생전 여러 업적을 남겼고, 4일간의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장례식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되며 발인은 26일 새벽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장례식장에서 형의 죽음을 애도하며 보인 모습은 그의 정치적 유산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여겨집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이상득의 정치와 삶은 앞으로도 많은 논의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유산과 사회적 영향
이상득 전 부의장이 남긴 유산은 단순히 정치적 성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남긴 여러 위기 관리 및 정책 개혁의 결과물이 현재 정치계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정치에서 쌓은 경험과 연륜은 후배 정치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으며, 비록 개인적으로는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의 정치적 유산은 계속해서 남아 세대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사후의 평가와 기억
이상득 전 부의장은 정치적으로 영욕의 세월을 겪은 인물로 여겨집니다. 그가 남긴 여러 기여와 실패 속에서도 그가 참여했던 사건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동생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와 그의 정치적 경력은 그를 잊지 않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며, 다양한 시각에서 그의 업적과 동시에 실패 또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이상득 전 부의장의 삶은 정치의 세계에서 많은 교훈을 전하며 그의 업적과 실패가 결합된 묘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그의 정치적 역할은 단순한 성공과 실패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가 걸어온 길의 모든 측면을 포함합니다. 향후 그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계속될 것이며, 후배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이상득 숏텐츠
질문 1.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인가요?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포항 동지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1961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대표이사직에 올랐습니다. 그는 동생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함께 ‘샐러리맨 신화’와 ‘흙수저 신화’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며, 1988년 정계에 입문하여 여러 주요 직책을 수행하였습니다.
질문 2. 그의 정치 경력은 어땠나요?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1988년부터 2008년까지 6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민정당과 한나라당 소속으로 국회 부의장, 최고위원, 원내총무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IMF 위기 시기에도 야당 원내총무로서 중요한 법안 통과에 기여했으며, '미스터 위기관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질문 3. 이상득 전 부의장의 개인적인 삶은 어땠나요?
이상득 전 부의장은 동생 이명박의 대선 도전과 관련해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후에 정치 활동을 접고 자원 외교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는 19대 총선 불출마 이후 금품 수수 혐의로 구속되었고, 그에 따른 여러 사건으로 인해 정치 경력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그의 개인적인 삶은 정치적 영욕과 관련된 복잡한 경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